중국 사천성 여행기
중국 九寨泃 여행기
□ 개관
○ 중국개관
중국은 22개성 5개 자치구, 4개 직할시, 2개특별자치구(홍콩, 마카오), 대만을 23번째 성으로 간주하는 2체제(자본, 공산) 1사회주의국가로 개방정책과 간자화로 문맹율을 낮추고 엄청난 속도로 발전을 하고 있으며 환율은 1위안에 166원이며 인구는 13억명을 넘고 있다고 한다. 원자바오 총리는 이번 청해 지진에 직접현장을 방문, 구조작업을 진두지휘하고 모금활동과 추모행사를 하여 티벳계 장족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으며 우리나라와 시차는 1시간 늦었다.
교통위반으로 적발되어 벌금통보를 받으면 눈을 밑으로 내리깔고 “죄송합니다.” 라고 해야지 이의를 제기하면 즉시 스틱카를 한 장 더 발급해 주고 욕을 하면서 덤비면 바로 체포되어 신용불량자로 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도록 처벌을 받으므로 절대 반항을 할 수 없고 벌금대신 교통계도 깃발을 들고 교통정리를 하면 다음 위반자를 발견하여 인계할 때까지 기압을 받는다고 한다. 또한 교통사고가 너무 많아 경미한 사고는 접수를 안하고 서로 합의하도록 하는데 만약 현장에서 서로 다투며 300m 정도 차가 밀리면 즉시 체포하여 처벌을 한다. 차번호는 川A 12343, 川B123123, 川CJS1234등으로 부여되는데 川은 사천성. A는 성도시, B는 면양시 등으로 구분되고 영어 알파벳이 일찍 사용된 것 같았다.
또한 해발 4,000m가 넘는 곳에서도 휴대폰이 잘 터지는 것으로 보아 이동통신은 발달된 것으로 보이고 피는 담배 종류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을 평가 하는데 등소평은 등화라는 60위안짜리 담배를 피웠고 모택동은 소연과 300원하는 작은 팬더를 피웠다고 하며 술대접은 상대가 고꾸라질 때까지 해야 대접을 잘 받았다고 하므로 사업을 하는 사람은 계약한 후에 술을 마셔야 한다고 한다. 또한 계란 후라이까지도 가짜가 있으며 화폐단위로는 원. 각. 오리(푼)이 있는데 위폐가 많아 새 돈은 잘 안받고 헌 돈을 받는데 서로 진짜인지 감식을 한 후 주고받으며 물건은 생산연월일을 확인 후 거래를 한다. 또 중국에는 공안 힘이 세지만 도찰이 공안을 감시하므로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데모를 하드라도 다중이 모여 침묵으로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만약 손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면 바로 체포된다고 한다.
○ 사천성에 대하여
四川城(쓰촨성)은 북위 27~8도, 남서쪽에 있는 중심 도시로 4개강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동으로 중경시, 남으로 운남성. 서쪽으로 서장자치구. 북으로 이번에 지진이 발생한 청해성이 있으며 성청은 성도에 있고 곤명 경유 차마고도로 가는 길이 있다. 또한 사천성은 등소평, 측전무후, 이백의 고향이며 문자가 없는 12개 소수민족인 티벳족, 회족인 장족과 대나무 잎을 좋아한다는 팬더곰이 사는 곳이다. 사천성에서는 마작을 단속하지 않으므로 많이 하는데 같이하는 사람 얼굴은 보지 않고 버리는 패만 보고 상대의 마음을 읽는 “나만 살면 된다는 개인주의와 울타리 정신”이 생겨나 소수민족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웠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알량미로써 불면 날아갈 것 같아 맛이 없고 배가 쉽게 고파진다고 한다. 성도에는 아카시아 꽃이 피어있었고 여행구간은 황룡사-구채구-평무-170km-강유-126km-면양-60km-덕양-60km-성도-낙산이었으며 고속도로 휴게실에 있는 화장실은 깨끗하면서도 사용료를 안 받는데 장족 등이 사는 산골에는 문도 없는 화장실 이용료를 꼭 받아 1위안짜리가 필요하였다.
○ 盛都에 대하여
해발 200m, 연평균온도 16.3℃인 분지지형으로 자원이 풍부한 사천성의 城都로써 1992년 개방된 총인구 1,200만 명의 도시다. 시내 중심지에는 민강이 흐르는데 강 가운데 시멘트 배 건물이 있으나 지금까지 1cm도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북으로 해발 5,588m인 민산산맥이 막고 있어 기후가 따뜻하고 황사가 없으며 2,000년 동안 전쟁이 없는 문화도시로 춘추전국시대에는 蜀의 도읍지였고 삼국시대 때 촉한을 통일한 劉備가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諸葛亮을 모시는 武侯祠를 비롯하여 두보가 시를 짓던 杜甫草堂·望江樓, 불교의 성지인 峨眉山:3,099m등이 있고 요리와 유채재배지로 유명하다.
도로는 자전거 전용도로 등이 있어 넓었으나 교통질서는 형편없었고 기후는 한국보다 약 1달 정도 빠른 편이며 택시강도가 없는데 그 이유는 운전자와 칸막이가 없는 대신 손님이 타면 자동적으로 사진이 찍히고 GPS가 있어 성도 외곽으로 나가면 공안에서 기사에게 손님의 신원을 조회하도록 하여 범죄를 예방하며, 예전에는 중경이 성도의 일부였으나 서로 감정이 안 좋아 잘 다투는데 중경사람들은 다혈질이라 바로 주먹싸움을 하고 성도사람들은 말하기를 좋아해 하루 종일 말싸움을 한다고 하며 성도의 겨울은 6℃이므로 온돌이 없어 굴뚝이 없고 의자에 앉아서 생활하며 솜옷을 입는다고 한다.
□ 여행일정
○ 첫째날(광주에서 성도로)
♤ 4. 17. 12:00 광주 고속버스 터미날에서 29,900원을 주고 광신고속을 타고 16:00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18:30 출국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에서 썬그라스와 모자를 사고 비행기를 기다렸다.
♤ 20:00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여 평균 고도 10,000m, 속도 800km/시로 별빛이 찬란한 칠 흙같이 어두운 밤하늘을 날아 23:50(중국시간 22:50)에 성도에 도착하니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비가 내려 바로 착륙하지 못하고 공중을 선회한 후 중국시간 23:10 착륙하니 기온은 16℃ 이었다.
⇒ 소요시간 4시간 10분(평균 3시간 45분소요)
♤ 01:30 芙蓉麗庭酒店 호텔에 도착하여 침대에서 잠을 자려고 하니 추워서 추리닝을 껴입고 이불을 덮고 잠을 잤는데 이곳은 겨울이 거의 없는 곳이라서 난방시설이 안 되어 있다고 한다.
○ 둘째날 (성도에서 구채구로)
♤ 06:30 일어나 식사를 하고 07:40 구채구를 향해 가는데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었다. 이곳은 안개 때문에 해를 거의 볼수 없는 지역으로 해가 보이면 개가 놀라서 짖고 사람은 햇볕을 쏘이기 위해 밖으로 나온다고 한다.
♤ 09:55 농업중심도시인 덕양을 지나 핵 연구원 등 과학기술의 요람지인 인구 600만의 면양을 경유하여 이백의 고향인 江油에 도착하여 李白故居를 둘러보았는데 두보가 현실을 비판하는 시를 쓴 대신 이백은 자연을 노래한 낭만적인 시를 썼으며 태백탑이 있는 기념공원에는 시를 돌에 새겨 놓았다.
♤ 10:30 강유에서 평무현으로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이곳은 당나라 때 한족이 티벳을 점령한 지역으로 몽고인, 인도인 등의 피가 석인 지역이고 티벳에는 야채가 없어 녹차가 필요 하다고 한다.
♤ 11:20 높은 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석회암지대라 물이 탁하고 가로수 밑 둥에는 가드레일 대용으로 흰 페인트로 약 1m 정도 칠하여 놓았으며 길옆에는 지진으로 무너진 가옥들을 짓느라고 건축공사가 한창이었고 논은 없었으며 간간이 유채 밭이 보였다.
♤13:40 2008년 쓰촨성 지진당시 가장 피해가 컸던 평무현 山珍玉酒家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황룡으로 갈려고 했는데 산이 무너져 도로가 막혀 갈 수 없다고 하여 14:30 바로 구채구로 향했다.
♤ 15:40 해발 3,000m에서 머리에 흰 깃털을 꽂고 살고 있는 백마장족의 마을을 지나면서 이곳 티벳 장족들의 장례문화는 만물에 신이 있다는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 화장 : 시신을 불에 태우는 장례. # 수장 : 시신의 내장을 꺼내 물에 버리고 몸통은 물에 가라앉게 만드는 장례. # 천장 : 시체를 토막 내어 새에게 먹게 하는 장례. # 탑장 : 탑을 세워 스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장례. # 돌장 : 유목민들의 젊은이들이 죽었을 때 돌집을 만들은 장례. 등이 있는데 수장을 하는 장족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고 회족은 흰 모자나 보자기를 쓰고 다니며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천장터에서 사람의 시신을 먹고사는 새는 키가 120cm나 된다고 한다.
♤ 16:30 꼬불꼬불한 길을 나선형으로 올라가는데 마치 차마고도의 절벽길 같은 느낌이었으며 버스의 엔진과 브레이크에 발생하는 열을 식히기 위하여 加水집에서 물을 교환하고 뿌리면서 해발 4,100m인 민산산맥 두견산 고개 정상에 올라가 잠간 내려 기념사진을 찍는데 고산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어지러웠다. 또 이곳에 사는 안다장족은 평생 꺼지지 않는 만년 불을 가지고 있고 태어났을 때, 결혼할 때, 죽었을 때 평생 3번만 목욕을 한다고 하며 이곳은 여자에게 말을 잘못하면 3년 동안 처갓집에 가서 방목을 해주고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하므로 사진을 함부로 찍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다.
♤ 18:00 길 양 옆에는 라마교를 믿는 장족들의 마을에 풍렴경이라 하여 울긋불긋한 깃발에 경문을 써서 꽂아 두면 바람에 흔들리며 경문이 읽어진다고 하였고 지붕이나 벽에 하얀 색으로 동물들의 머리상을 붙이거나 그려놓았으며 집집마다 위성 안테나가 있었는데 정부에서 2/3, 본인이 1/3의 경비를 부담하여 설치하였다고 한다.
♤ 19:00 九寨泃 도착하여 해발 1,600m 있다는 格桑호텔에 여장을 풀고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복분자 주를 몇잔 먹고 알딸딸한 기분에 그곳 가게에 들려 이것저것 물건을 살펴보고 구경을 한 후 전기장판과 온풍이 되는 따뜻한 방에 들어와 잠을 잘 잤다.
○ 셋째날(구채구에서 황룡사로)
♤ 08:00 일어나 뷔폐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구채구로 출발 하였다. 이곳은 1992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 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산은 평균 70도 수직 산으로 지진이 발생하면 모두 무너져 길이 막히고 집을 덮칠 것이 뻔하였다. 이곳 공항은 산봉우리를 깍아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해발 3,500m에 건설했는데 돌풍이 많아 비행기 운행이 어려워 지위가 높은 계층이 이용하므로 요금이 엄청나게 비싸다고 한다. 성도까지 버스는 11시간 20분, 비행기는 2시간 30분이 걸리며 요금은 20만원 정도 된다.
♤ 09:50 구채구란 9개 티벳트 장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란 뜻으로 연꽃마을, 수정마을 등 현재 3개
마을만 개발되었으며 이곳 날씨는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입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다양한 형태의 호수가 있는 樹正폭포와 수정群海를 지나 티벳어로 웅장하다는 낙일랑 폭포, 달력에 나오는 풍경화 같은 오화해, 해발 3,100m에 있는 어머니 호수라는 수심 40m의 장해, 펜다가 어슬렁거린다는 펜다해, 호랑이 바다라는 老虎海, 코끼리 호수, 다섯 가지 색이 뿜어나오는 五彩池 등을 走馬看山 격으로 보면서 제일 위쪽에 있는 창암 앞에서 만년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내려오면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중점적으로 관람하였는데 호수에서 5가지 색깔이 나는 이유는 석회석이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깊이에 따라 다르게 햇빛에
반사 굴절되어 나타나는 현상이고 나무나 돌에 석회석이 1cm 붙으려면 100년이 걸려야 하므로 절대 물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 12:40 구채구 관람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후 관광회사에서 황룡관람을 하면 낙산대불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여기까지 와서 안보고 갈 수 없다고 항의를 하여 오후에 황룡사를 가기로 계획을 수정, 구채구입구로 이동을 하였다.
♤ 13:30 버스를 타고 황룡으로 출발 하였는데 티벳과 접경지대인 해발 3,000m 고원에는 원주민인 유목민 장족들이 야크와 말을 방목하고 있었고 낙천산장이 있는 천주마을과 황금이 많이 묻혀있다는 장나산을 지나니 만년설이 있었는데 이곳은 97년 전에는 술, 돈을 탈취하는 강도들이 많았으며 시냇물에는 물고기가 많다고 한다.
♤ 15:00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가면 히말리아 정상이라는 버섯모양의 해발 5,588m인 설보정을 보면서 4,200m의 설산령을 넘어가는데 구불구불한데다 지진으로 파손된 도로공사를 한다고 노면도 고르지 않아 반대편 차와 서로 교행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고개정상에는 구름이 10m도 안보이도록 끼어버렸지 길옆은 천길만길 낭 떨어지지 정말 위험한 여행이었다. 이곳은 길이 험하여 운전기사도 1명이 더 따라와 교대하며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T.V에서 본 차마고도 절벽 길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새로운 환경과 경험에 호기심은 더욱 강해졌지만 만약 여기서 사고라도 난다면 시신은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이르자 조금은 걱정도 되었으나 “죽지만 않는다면 가장 재미있는 놀이는 전쟁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모택동은 53년도에 이 고개를 넘어 티벳해방(점령)을 하였고 62년도에 짚차를 타고 9일에 걸쳐 이 길을 넘어 티벳에 갔다고 한다.
♤ 17:00 해발 3,400m에 있는 황룡사 케이블카 타는 곳에 도착하여 매표를 하였는데 오후 5시가 넘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하여 우리는 신속하게 케이블카를 타고 빨리 걸었다.
♤ 18:10 거의 특수부대 수준으로 해발 3,600m의 황룡사에 뛰어 올라보니 위도상 28도인 남쪽임에도 고산지대라서 눈이 쌓여있었으며 중화민국 도교사찰임을 증명하는 내용의 松瀋縣 縣政府 포고 제 4호가 있었고 현판에 黃龍古寺, 그 밑에 山空水碧이 있었는데 좌우측에서 보면 운功大浩, 우측에서 보면 心傳遙接으로 보였으며 약 600m 위에는 석회석으로 만들어진 방죽 연못이 있었고 조금 더 위 전망대에 올라가보니 황룡사를 작은 호수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 이었다.
♤ 19:20 하산을 하면서 보니 석회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연못이 많았는데 거의 흰 하천 같은 모습으로 폭포 같은 형태를 갖고 있는 것도 있었으며 조금 밑 중간쯤에 황룡중사가 있었는데 벽에 十 와 가 새겨져 있어서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라마교 산신당이라고 하였다.
♤ 19:40 어둑어둑해져 산에서 내려왔을 때 우리 일행 중 고산증세가 있어 황룡사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오바이트를 하고 누워 있다가 부축을 받으며 내려왔다고 한다. 나도 약간 숨이 가빠지려고 하여 복식호흡을 하면서 조절을 하였으며 가끔 발을 헛디딘 것 같은 어지러움이 있었으나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우리가 탄 버스는 낮에 갔던 그 험한 길을 밤에 다시 되돌아오는데 눈은 펑펑 쏟아졌으나 운전기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열심히 운전을 하였다. 우리가 낮에 이 길을 지나가면서 도로공사를 하는 인부들을 보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흉을 보았는데 이 고산지역에서 눈을 맞아가며 불을 밝혀놓고 21:00까지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지만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도록 과업을 준게 아닌가 생각이 되었다.
♤ 21:45 제일 험한 설산령을 넘어 해발 3,000m에 있는 원주민인 장족이 사는 天主마을 식당에 들어가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했는데 이곳에는 된장과 고추장 상추가 있어 맛있게 먹었다.
♤ 23:10 반주를 너무 많이 먹었는지 한참을 졸다보니 구채구 호텔에 도착하여 대충 씻고 방을 따뜻하게 한 후 잠을 푹 잤다.
관광버스 소개 우리 일행은 14명인데 버스는 꽤 큰 35인승 정도인데 운전사는 2명이었지만 히타도 안 되고 속도기도 고장이 났으며 안전벨트는 아예 없고 악셀은 밞았다 놓으면 올라오지 않아 고무줄로 묶어 놓았으며 기아변속이 안되어 몇 번씩 멈추었다 다시 출발 하는 등 가는데 3시간 30분 소요 |
○ 넷째날(구채구에서 성도로)
♤ 06:00 버스를 타고 성도로 오는 길에 가이드가 중국에 숙박업소는 빈관은 수상 등 높은 분이 자고, 초대소는 공무원급, 대하는 종합상가 같은 숙소이며, 주점은 술집과 같이 있는 숙소이고 호텔은 외국에서 들어온 숙박업소라고 하며 티벳 장족들은 목축업을 하는 유목민이기 때문에 개를 가족같이 생각하고 사람이 죽으면 천장, 수장을 하기 때문에 물고기, 새고기, 개고기는 안 먹는다고 한다. 특히 유목민이 키우는 장호라는 개는 개골격이 아니고 사자와 같으며 야크나 양 100마리를 혼자 몰고 다니고 호랑이에게도 덤비는 강한 개라고 하였다.
♤ 10:20 해발 4,100m이며 아슬아슬한 절벽산길의 두견산을 넘어 오는데 갈 때에는 잘 몰랐으나 이곳도 정말 위험한 구간이었다. 산에서 끊임없이 바위 흙 등이 떨어져 내려오니 항상 그 구간을 관리하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언제 길이 막힐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산을 넘어 오자 평무 풍경지구 골짜기에 수력발전소가 4개가 있었는데 물은 많지 않았으나 낙차가 커서 발전하기에 용이한 것으로 보였다. 평무현에는 십자가가 있는 천주교가 있었으며 약 600년 전 명나라 때 건축된 報恩寺가 있었는데 사찰 밑에는 호수가 있어서인지 심한 지진 피해를 입지 않아 청하대학에서 건축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 13:30 平武에서 점심을 먹고 江油를 거처 16:50 고속도로에 올라왔는데 도로주변에 자본주의 색채가 가득한 선전 간판이 수십 개가 서 있었으며 트럭은 소형이나 중형은 없었고 초 대형트럭인데 짐을 가득가득 실고 다녔으며 속도는 1차선은 小客車輛이라하여 100~120km, 2차선은 客貨車輛이라하여 60~100km를 달리도록 차선별로 달리 규정하고 있었다.
♤ 18:30 성도 톨게이트에 도착하니 길을 안내하는 신종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10여명 있었는데 지역이 워낙 넓고 네비게이션이 잘 맞지 않아 돈을 주고 안내를 받는다고 하며 구채구에서 성도까지 고속도로가 아닌 곳에서도 도로비 50위안씩을 받는 것 같았는데 도로비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았으며 시내로 들어오니 시내도로가 아주 넓어 자전거 도로가 따로 설치되어 있었으며 나무가 많은 대신 아파트가 공간이 없이 붙어 있었고 건물 모양은 각기 다르게 설계되어 도시모양이 좋아 성냥갑 모양으로 설계한 우리가 배워야할 것 같다.
○ 다섯째 날(성도에서 낙산대불, 무후사로)
♤ 4. 21. 07:40 성도에서 남쪽방향에 있는 성락 고속도로를 따라 낙산대불로 가면서 미산 26km, 낙산 86km인데 차가 막혀 시간이 많이 걸렸으며 산에 집 모양의 가족묘가 있었는데 청명, 한식이 되면 자손들이 종이 자동차나 1억짜리 종이 지폐를 가지고 가서 태워준다고 한다.
♤ 10:40 고속도로에서 아미산, 낙산 방향으로 내려가니 저 멀리 해발 3,099m인 峨眉山이 보였는데 북위 27도 지점이라 만년설이 없고 24종류의 두견화 군락지가 있으며 차나무, 산약초, 대나무가 유명하고 원숭이와 비구니 스님이 많고 스님들의 무술이 강하다고 한다.
♤ 11:10 아미산 으로부터 31km 떨어진 낙산시에 들어서니 여경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낙산대불을 보기 위하여 민강의 배를 타고 나갔다. 이곳은 3강 (岷江, 靑衣江, 大渡河)이 합쳐지는 지점으로 1,200년 전 배가 침몰하여 사람이 많이 죽자 이를 막기 위하여 해통스님이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하여 어깨까지 조각하고 입적하시자 후세사람들이 90년에 걸처 낙산대불을 완성 하였는데 불상이 하나의 산이요, 산이 하나의 불상이다(佛是一座山, 山是一尊佛)"라하여 대불의 높이가 71m, 머리 높이가 14.7m, 귀 길이 6.72m, 코 길이 5.33m, 눈썹 두께가 24m나 되고 대불 주위로 100명이 넘는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대불을 보호하기 위하여 13층 높이의 누각을 지었는데 약 800년전 소실되었으며 그 이후 지진과 전쟁이 있었지만 부처님상은 그대로 보존이 잘 되었는데 비가 오면 빗물이 귀 뒤에 홈과 옷깃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되어있다고 한다. 불상 뒤편의 절벽에는 "해사동(海師洞)"이라고 불리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이는 해통법사가 기거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위에 낙산대불을 수호하는 凌雲山와 영보탑이 보인다.
♤ 11:50 배 타는곳 바로 옆 龍游酒樓에서 점심을 먹고 12:30성도로 돌아오는데 가로수 가지에 뿌리가 수염처럼 나 있었고 소동파의 고향인 낙산에는 동파물고기라 하여 죽칼을 사용하여 요리를 하는데 쇠칼로 요리를 하면 맛이 없다고 하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티벳 동쪽 발원지에서 시작한 민강이 이곳 가주에서 3강이 합쳐져 성도→중경→남경→상해→양자강으로 6,200km를 흘러간다고 하여 황하강 5,800km보다 더 긴 강이다.
♤ 15:00 북해도 休閑會所 도착하여 그동안 피로가 쌓인 발의 피로를 풀기 위해 발 마사지를 받고 16:20 삼국성지라고 하는 武侯祠에 도착하였는데 무후사는 유비와 장비 관우 등 촉나라의 여러 명장을 거느린 전설의 전략가, 제갈공명(제갈량)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경내로 들어가면 황금의 유비상이 안치되어 있는 유비전과 제갈량전이 있고 그 옆동에 촉한의 문·무관 28위의 동상 및 '諸葛鼓'라 칭해지는 북 등이 있고 무후사 뒤편에는 유비의 묘인 둘레 120m의 惠陵과 唐碑가 있었다.
♤ 武侯祠와 제갈량에 대해...
자는 孔明, 벼슬 전 臥龍先生이란 인물로 劉備의 三顧草廬로 君臣水魚之交를 맺은 다음 吳의 孫權과 연합하여 조조를 대파하는 등의 수많은 戰功을 세워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에는 어린 後主 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吳와 연합, 魏와 항쟁하였으며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前出師表, 後出師表는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千古의 명문이라고 하며 유비전에는 유비와 그의 손자 동상은 있는데 아들의 동상이 없는 것은 “나라가 망해도 나는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면서 백성들을 돌보지 않은 군주라고 하여 동상을 제거했는데 그의 손자는 나라가 망하자 처자식을 죽이고 자기도 자살을 했다고 하여 숭배를 한다고 하였고 제갈량의 소개로 못생긴 방통을 책사로 얻어 도움을 받은 유비가 자기 말을 주면서 타도록 하였는데 적이
유비인줄 알고 방통을 죽였다는 것과 장비는 인간성이 나빠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삼국지 내용을 설명 들으면서 삼국시대 거리를 재현하여 놓은 금리거리를 돌아보고
나왔다.
♤ 17:10 관람을 마치고 帝寶비단공사와 천연수지로 매트리스 등을 만드는 라택스공장을 방문, 쇼핑을 한 후 20:00 식당에 가서 사천성 전통요리인 고기 사브사브를 먹는데 너무 맵고 음식향이 짙어서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으며 21:40 공항으로 이동하여 출국수속을 마친 후 대기
○ 여섯째 날(성도에서 인천으로)
♤ 00:20 성도 공항을 이륙하여 03:20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는데 한국시간으로는 1시간 빠른 04:20이었으며 갈 때는 04:10이 걸렸는데 올 때는 3시간 밖에 안 걸렸다.
♤ 06:50 공항에서 일본국수를 한 그릇 먹고 대기하다 광신고속 버스를 타고 11:00 광주버스 터미날에 왔는데 4시간 10분이 걸렸다.